[현장에서] 휠체어 타지만 죽을 때까지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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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휠체어 타지만 죽을 때까지 여행을
  • 편집부
  • 승인 2023.06.08 10:33
  • 수정 2023-06-08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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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정_휠체어여행가, 칼럼니스트

휠체어를 타는 중증장애인이지만, 틈만 나면 여행을 가는 나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휠체어를 타고 여행을 어떻게 가요? 휠체어 타고 여행하면 힘들지 않아요? 휠체어를 타고 도대체 어떻게 한 달이나 여행해요? 라고 말이다.

여고 시절 불의의 사고로 휠체어를 타는 하반신 마비 중증장애인이 되어 좌절의 시간을 겪었지만, 여행을 만나고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행이 너무 좋아서 우리나라 구석구석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러다 1998년에 한 신문사 이벤트에 당첨되어 처음으로 일본 여행을 하게 되었다. 국내 여행도 너무 좋지만, 낯선 해외를 여행하는 것은 그전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신세계였다. 그 뒤로 여행을 가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도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친구, 가족들과 혹은 나 혼자, 낯선 곳을 찾아 여행을 다녔다.

휠체어를 타는 중증장애인인 내가 혼자 처음으로 갔던 여행지는 홍콩이었다. 사실 정말 힘들었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거지 취급을 받기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이 가득한 채로 휠체어를 그렇게 많이 밀어 본 것도 처음이었다. 영어도 한마디 못 해서 역무원과 손짓, 발짓해가며 난감한 일도 많았다. 게다가 마지막 날은 여행의 모든 것이 담겨 있던 소중한 디카를 잃어버리고, 비행기도 놓칠 뻔했다.

홍콩에 이어 대만, 일본, 필리핀, 미국으로 나 홀로 여행을 해보면서 비장애인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계단이나 턱이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뭐라도 하나 사려고 하면 손이 닿지 않는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는 것부터가 나에게는 도전이었다. 버스나 지하철을 한번 타기 위해서도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해야 했다.

혼자 하는 여행은 휠체어를 타고 만나게 되는 환경의 장벽들을 나 혼자 어떻게든 해결해 나가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작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나하나 해보면서 자신감이 조금씩 쌓여가는 시간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이 더해지면서 자존감이 올라갔고, 나 자신을 더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방황하던 20대 시절, 여행을 통해 내가 다시 나아가야 할 길을 찾게 되었다. 또, 휠체어를 타더라도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분명히 얻게 되었다. 그 확신과 자신감으로 더욱 힘차고 당당하게 살 수 있었다. 수많은 여행 덕에 지금의 행복한 내가 있고, 여행이 나를 다시 살게 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30대에 결혼을 하고, 허니문 베이비에 연년생을 낳았다. 육아에 지쳐 한동안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다 아이들이 3살, 4살이 되었을 때 드디어 다시 용기를 내어 여행 예약을 해버렸다. 하지만 첫째가 밤에 이유 없이 깨서 한두 시간씩 우는 야경증에 심한 낯가림도 있었고, 밥도 잘 안 먹는 진짜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아이였다. 게다가 더 어린 연년생 둘째까지 데리고, 처음 코타키나발루 여행을 가려니 걱정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여행이 마법이라도 부리듯 걱정하던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예민함의 날을 세웠던 첫째와 육아 우울증, 불면증에 시달리던 나, 어렸지만 함께 스트레스를 받았을 둘째, 일과 육아에 너무나 지쳤던 남편, 우리 가족 모두는 이 여행으로 여유와 활기를 느끼며 진정으로 힐링할 수 있었다.

그 뒤, 역시 나는 적금으로 돈이 모이는 대로 가족여행을 가기 시작해서 마흔 중반이 된 지금까지 휠체어를 타고 20개국, 25번의 해외여행을 했다. 아이들이 5살, 6살부터는 남편 없이 휠체어 타는 엄마인 나 혼자, 아이들을 베트남과 일본 도쿄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리고 첫째가 7살이 되던 해는 미국, 캐나다, 멕시코를 37일 동안 가족여행을 했다. 둘째가 7살이 되었을 때는 정말 낯선 나라, 도미니카공화국을 여행했다.

그리고 코로나 시국에 제주 한 달 살기를 나 혼자 아이들과 했다. 올해 초에 했던 사이판 한 달 살기는 휠체어 타는 엄마인 나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과 오롯이 보낼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고, 사춘기에 접어드는 첫째와도 돈독한 관계를 맺는 기회가 되었다.

나와 우리 가족에게 여행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여행하면서 평소에는 겪을 수 없는 새롭고 힘든 경험을 하면서 함께 헤쳐나가고, 이렇게 가족 간의 행복한 기억과 추억을 만들게 되었다. 여행을 통해 우리 가족만의 우애, 서로 사랑하는 시간, 경험을 공유하고 느낀다는 것은 정말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러므로 나는 여행을 절대 포기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이제는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조금만 더 지나면 함께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서 최대한 더 하고 싶다. 앞으로 부모와 여행하는 것을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 나이가 오면, 그때는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체적으로 불편한 내가 엄마로서 우리 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사랑이 듬뿍 담긴 행복한 기억과 추억을 주는 것밖에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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