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 교사 최별이 말하는 장애인 교사의 삶_“자신의 장애를 드러냄으로써 성숙해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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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 교사 최별이 말하는 장애인 교사의 삶_“자신의 장애를 드러냄으로써 성숙해지는 삶”
  • 정은경 기자
  • 승인 2023.05.08 16:00
  • 수정 2023-05-11 1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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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서 장애인 교사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전체 교원 50만7천여 명 중 장애인 교사는 5천 명 남짓이니 겨우 1% 정도다. 스승의 날을 맞아 일반 학교에서 비장애인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장애인 선생님’을 만나보려 했지만 그런 선생님을 찾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럼 특수학교에 재직 중인 장애인 교사는 있을까. 역시 쉽지 않았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기자의 레이더망에 ‘최별’ 교사가 잡혔다. 청각장애를 지닌 9년차 중등교사. 일반학교 특수반과 특수학교 교사를 거쳐 현재는 인천교육청의 특수교육지원센터에 근무하고 있는, 특수교사로서는 경험해볼 수 있는 모든 유형의 임지를 겪어 본 교사다. 그에게 특수교사가 아닌 장애인 당사자 교사로서의 삶을 듣고 싶었다. 겉으로 보기 장애 표시가 나지 않는 청각장애인인 최 교사는 그래서 더욱 장애인 교사로서 살기가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초임 시절부터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조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현재까지 그녀의 교사로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출장을 나갔다 들어오는 길, 고학년 아이들이 체육수업을 하는지 운동장에 나와 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청량할 터다. 인천광역시교육청 특수교육지원센터 소속의 최별 교사는 차를 주차장에 대고는 잠깐 운동장를 바라보다 건물로 들어선다. 최별 교사는 청각장애를 지닌 교사다. 센터 사무실이 자리한 곳은 인천 부평구 계산동의 안산초등학교. 교사 한 동의 5층 교실을 빌려 쓰고 있다. 출퇴근 때나 오늘처럼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만나는 아이들의 모습에 늘 힘을 받곤 한다.

최별 교사가 센터에 온 지는 올해로 3년째. 9년차 교사인 최 교사는 초임 시절 3년을 충남 천안에 있는 환서중학교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다음 3년은 특수학교인 인천 청인학교에서 직업 과목 교사로 아이들과 함께했다.

 

교사 인생의 전환점, 장교조와의 만남

지금 여기 장애인 교사가 있다는 외침

 

최 교사의 교사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인 된 것은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조’(이하 장교조) 참여다. 2019년 잘 아는 청각장애 동료 교사로부터 이러저러한 단체를 만들려고 하는 데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최 교사는 망설이지 않고 오케이했다.

“교육 현장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던 때였어요. ‘내가 아무리 소리높여 말해도 아무도 내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구나’ 하는 답답함이죠. 예를 들어 우리 청각장애 교사들에게 보조교사 지원이 필요하다든지, 교사 연수에 문자통역기 같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답답했죠.”

때맞춰 장교조 참여 권유를 받았고, 한두 번 모임에 참석하면서 자신보다 빨리 교사가 되어 몸으로 싸워 온 선배들을 만났다.

“교원 임용 시험에서 장애인 구분 모집이 시작된 것은 2007년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경력이 오래됐다 해도 당시 10년차 정도인데, 그 10년은 선배 교사들이 이러저러한 차별에 맞서 싸워온 세월이기도 하죠. 그런데 선배들 중에는 바위에 부딪는 계란처럼 싸우다싸우다 지쳐 그 상처가 덧나고 터져 더이상 감싸안을 수조차 없게, 그래서 외곬수로 되신 분도 있더라고요. 물론 무수히 알을 깨고 나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분도 있고요. 그 선배들을 보며 나와 같은 청각장애 교사들이 더이상 좌절하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 말이, 편의시설을 지원해달라는, 차별하지 말아달라는 내 목소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기도 했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모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 최별 교사는 장교조의 사무총장 역을 맡고 있다. 사진은 지난 4월 28일 세종 정부청사 앞에서 있었던 장교조의 기자회견.

그렇게 최 교사는 장교조의 일원이 됐고, 그때까지보다 더 열심히 장애인 교사의 권익과 교권 향상에 목소리를 높이게 됐다고 한다.

그런 최 교사에게 “이 땅에서 장애인 교사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냐”고 묻자 “자신의 장애를 드러냄으로써 성숙해지는 삶이 이 땅에 사는 장애인 교사의 삶인 것 같아요.”라는 의외의 답이 나왔다. 혁명가적인, 최소한 투사다운 답이 나오리라는 예상을 깨는 답변이었다. 사실 최 교사와의 인터뷰는 내내 예상 답안이 오답인 것을 확인하는 인터뷰였다. 모든 질문에서 그녀는 예상외의 답을 내놨다.

 

“장애인에게 교사는 꽤 안정적인 직업”

그러나 장애인 배려 없는 임용시험 준비

 

예상 답안과 가장 다른 답은 왜 교사가 되었나 하는 질문에 대한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기자의 예상 답안은 ‘투철한 사명감’ 또는 최소한 ‘아이들이 좋아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최 교사의 답은 “교사가 안정적인 직업”이어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공부 좀 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권유되는 직업은 보통 세 가지 정도에요. 약사, 사회복지사, 특수교사. 그중 부모님은 제가 선생님이 되길 원하셨죠. 부모님 보시기에 선생님이 제게 가장 잘 맞을 것 같고, 제가 삶을 살아나가면서 장애를 이유로 큰 차별 없이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보신 거죠.”라는 부연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실제로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회복지사나 특수교사가 그리 훌륭한 직업으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사회적인 위치도 그렇고, 수입도 그렇고…. 그럼에도 교사가 공부 ‘잘’ 하는 장애 학생들에게 추천되는 ‘가장’ 좋은 직업 중의 하나라는 건, 그만큼 이 땅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질 수 있는 변변한 직업이 없다는 말도 돼요.”라는 최 교사의 말에는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특히 입시를 앞두고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어서 자신이 어떤 과에 갈 수 있는지조차 몰랐던 고등학생 최별로서는 부모님의 가이드가 가장 영향력이 컸다는 말에는 이의를 달 수 없었다.

“의외셨나요? 괜찮아요. 선생님이 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거든요.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이왕이었으면 미술선생님이 될 걸 그랬다는 거예요. 막연하게 나와 같은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 보면 어떨까 했거든요. 그런데 특수교육과를 나와서는 그림을 가르치지 못하더라고요. 대학교 전공이란 거에 대해서 너무 몰랐던 거죠. 장애를 가진 입시생을 위한 문자통역기나 수어통역 등 편의지원을 하는 입시설명회는 단 한 곳도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선생님이 될 수 있었던 것만도 부모님께 감사할 일이죠.“

사실 ‘교사’가 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최별 교사가 졸업한 대구대 특수교육과는 다른 대학과는 달리 장애를 가진 선후배 동기가 꽤 많은 과였음에도 교사 임용시험 준비 과정에는 곳곳에 걸림돌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청각장애인이 임용시험을 준비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시험 준비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동영상 강의가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제작되었다는 겁니다. 문자통역이나 수어통역이 지원되는 것도 아니고, 하단에 자막이 들어간다손 치더라도 강사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비장애인들보다 서너 배는 더 공부를 해야했어요.”

따질 곳도 없었다.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면 장애학생지원센터에, 교사라면 교육청에 교육청에 하소연하고 해결을 부탁하겠는데 취준생 신분이니 어디에도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다른 장애를 지닌 경우도 임용시험은 비장애인에 비해 서너 배 아니 그 이상의 노력을 요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각장애다, 임용시험 준비에 필요한 책 중 점자로 된 책은 거의 없다. 결국 하나하나 모두 점자책 제작을 본인이 의뢰해서 받아야 한다.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일 년이 걸려야 받을 수 있다. 교사가 되기 위한 장벽이 이렇게 높으니 우리 주변에서 장애인 교사 보기가 어려운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초임 시절이었던 천안 환서중학교 특수반에서의 수업 모습

 

특수교사와 장애인 교사의 이중고 겪다

편견 없이 다가와준 선배 교사 잊지 못해

 

최별 교사의 초임지는 충남 천안의 환서중학교였다. 2015년 처음 그곳에 부임했을 때 최 교사는 장애인 교사로서보다 특수교사로서의 어려움을 더 많이 느꼈다.

“일반 학교에서 특수반은 학교 안의 또 다른 학교입니다. 우선 특수반이 하나밖에 없었죠. 특수교사가 저 혼자였다는 말이 됩니다. 특수반에 오는 아이들은 많을 때는 다섯 명까지 있었는데, 장애유형이 제각각이었죠. 그러니 아이들 하나하나 그에 맞는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수업시수가 일주일에 29시간(중고등 교사들의 평균 수업시수는 주당 18시간 정도다)까지 되더라고요.”

거기다 일반 교사들보다 더 많은(특수교사가 한 명이다 보니) 행정 업무에, 보호해주는 부장교사가 없어 관리자나 학부모를 모두 직접 만나야 했다. 특수교사가 부딪는 어려움이 먼저 최별 교사에게 다가온 것이다. 여기에 그녀의 장애가 어려움을 더했다.

“특히 그때는 문자통역기가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학생 어머님이 전화를 하셔서 불만을 마구 말씀하셔도 정작 저는 그것을 못 알아들으니….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힘들고 두려웠죠.”

특수교사로서 업무에 치이고 수업에 떠밀리다보니 편의 지원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다시 돌아봐도 외롭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내가 청각장애를 지녔으니 이러저러한 편의를 지원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고, 동료들에게도 먼저 다가갈 여유도 생겼지만 초임의 최별 교사는 동료 교사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마치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여럿이 모여 있을 때는 선뜻 끼어들 수가 없었어요. 잘 들리지가 않으니….”

그때 ‘짠’하고 나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선배 교사가 있었다. 홍현심 교사다.

“초임 시절 아무것도 모른 채 특수교사로 부임해 당황하던 나를 따듯하게 감싸안아준 선배였죠. 동료 특수교사도, 선배도 없이 섬처럼 고립되었던 내게 먼저 다가와 어려운 점이 없냐고 물어주시고, 어려울 때 손 내밀면 언제든 잡아주셨던 분입니다. 아마 처음이었을 것 같은데, 그 선생님 앞에서 업무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펑펑 운 적도 있어요.”

최 교사에게 홍현심 교사는 학창시절에 만났던 그 어떤 선생님보다 더 ‘선생님’ 같았다고 한다. 사람을 대할 때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그래서 누가 기억에 남는 선생님을 물어오면 꼭 그를 꼽는 선생님 말이다.

 

무심하게 주고 간 꽃 한 송이에 힘 얻기도

“당당한 스승이 당당한 제자를 기른다”

 

힘들었던 초임 시절을 끝내고 인천에 있는 특수학교인 청인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이곳에서 최 교사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다.

“특수학교에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우리 아이들에게는 지식보다는 사람들 간의 소통, 관계맺기 등을 우선 가르치는 게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 측면에선 특수학교가 더 유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아이들에게 ‘어우러짐’을 가르치는 것이 우리 교사들의 역할이라고 요즘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중고등학교 과정의 직업을 담당하면서 장애 학생들의 미래를 책임질, 보다 현실적인 ‘일’을 찾아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았다. 그래서 다음 임지를 선택하라면 고등학교를 선택하고 싶다고 한다. 자신처럼 정보가 없어서 보다 더 나은 선택의 기회를 제한받지 않게, 학생들에게 더 많은 미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선생님’이 되고픈 것이다.

곧 스승의 날이다. 기억에 남는 스승의 날을 묻자 최별 교사는 입가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아무래도 교사가 된 첫해에 맞은 스승의 날인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어려웠지만, 초임의 열정으로 한 주에 29시간의 수업을 했던 그때, 선생님의 열정을 알아주듯 무심하게 툭 하고 카네이션 한 송이를 건네고 사라지던 특수반 아이들의 모습이 내내 가슴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환서중학교에서의 마지막 해에 만났던 아이(일단 철수라고 해두자), 그 철수가 아직도 가슴에 먹먹하게 남아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교육관의 차이로 구어도, 수어도 제대로 못했던 청각장애 학생 철수는 소통이 힘든 아이였다. 소통이 안 되니 수업 중에 나가려고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할 때 물리적으로 제지를 해야 할 때도 많았다.

“일 년 내내 철수랑 어지간히도 실랑이를 벌였죠. 그런데 전근 가기 전날 교실 칠판에 철수가 교실 칠판에 ‘선생님 고마워요’라고 써놓고 간 거예요. 그걸 보니 코가 시큰해지더라고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아이예요. ”

장애 학생들의 특성상 스승의 날 찾아와 주는 제자들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아이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진다고 한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며 꼭 하고 싶었던 질문을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던졌다. 혹시 자신과 같은 청각장애 제자가 있고, 그가 ‘교사’가 되고 싶다면 어떤 말을 들려줄 것인가.

“교사는, 특히 장애 교사는 사명감만을 갖고는 할 수 없는 직업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장애를 숨기지 말고 드러내고 당당히 지원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하고, 정신적으로도 건강해야 합니다. 정당하게 편의 지원을 받아야 해요. 예를 들어 신규 교원이 되어 첫 연수를 갔는데, 문자통역 지원이나 수어 통역 지원이 안 된다면 그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게 되잖아요. 그럼 점점 뒤처지게 될 거고요. 선생님이 당당해야 학생들도 더 당당하게 자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의 권리도 찾고, 그럼으로써 더 좋은 선생님이 될 것, 후배들에게 주고 싶은 말입니다. 저는 초임 때 그러지 못했거든요.”

이 땅에서 장애인 교사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장애를 드러냄으로써 성숙해지는 삶”이라는 그녀의 말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마지막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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