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접근성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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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접근성 보장
  • 편집부
  • 승인 2022.08.19 11:08
  • 수정 2022-08-19 1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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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용/법무법인 에이치스 장애인법연구소 소장, 법학박사

80대인 어머니에게 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의 사용법을 틈틈이 가르쳐주고 있다. 고령인 노인의 입장에서 종류와 작동법이 각기 다른 키오스크에 익숙해지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안내 화면 속 작은 글씨를 읽기 쉽지 않고, 카드를 투입할 곳도 찾기가 쉽지 않으며, 적립이나 바코드 스캔을 요구하는 복잡한 매뉴얼은 노인의 정보 접근권을 방해하여 이용자를 초라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정보 약자인 노인이 이런 불편을 겪고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장애인들에게 키오스크는 어떤 존재일까? 휠체어 장애인은 높이의 장벽 앞에서, 시각장애인은 애초 접근성이 완전히 배제된 소리 없는 벽 앞에서 일반적 행동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게 된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9조에는 ‘접근성’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동 협약은 우리나라가 체결 비준하여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가는 ‘장애인이 평등하고 자립적으로 생활과 삶의 모든 영역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물리적 환경, 교통, 기술 및 체계를 포함한 정보와 의사소통, 시설 및 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를 부담한다. 이에 따라서 장애인차별금지법은 법률 개정을 통해 2023년 1월 28일부터 무인정보단말기의 설치·운영 시 접근성 보장을 위한 정당한 편의제공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이 법률은 공포 후 이미 1년 6개월의 긴 시행유예를 두었다). 그러나 현재 준비 중인 보건복지부령의 시행령안에 따르면 100명 이하의 노동자를 고용한 사업주에게는 2025년까지 법의 적용을 유예하고, 2023년 1월 이전에 설치된 단말기의 경우 2026년 1월까지 3년간 적용을 유예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즉, 앞으로 3년에서 4년까지 키오스크 설치·운영자에게 접근권 보장의무를 면제해 준 것으로서 장애인에 대한 접근성 배제를 적법하게 만들어 준 셈이다.

우리 헌법은 ‘포괄위임 금지의 원칙’을 일반적 법규 제정의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는데 그 내용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사항에 관한 행정입법으로의 위임은 국회의 입법권이 행정부에 이전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위임입법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의 구체성과 명확성 그리고 예측 가능성이 엄격하게 요구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현재 마련하고 있는 보건복지부령안은 과도하게 긴 유예기간을 설정함으로써 법률의 제정 목적을 무력화시켜 결과적으로 장애인의 접근권이라는 기본권 실현을 봉쇄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점에서 중대한 입법적 하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장애인을 주요인물로 그린 드라마가 연달아 큰 조명을 받고 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다운증후군 장애인과 그 가족이 겪은 편견과 차별 그리고 장애인의 고립화 과정을 시설, 특수학교, 이웃의 시선을 통해 고발했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변호사로서 장애는 ‘고유한 소수의 정체성’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드라마 속의 우영우가 느끼는 회전문의 공포는 어떤 이들에게는 평범한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키오스크 앞에 낯설게 서 있는 고립된 장애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법학자로서 특히 접근권 관련 법률에서 느끼는 난감함은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 등 불명확한 개념을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고 있는 수많은 적용 예외 규정이다. 지난 7월 13일 국회의원 김예지 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제정 과정에 나타난 문제에 관해 언급하면서 “장애인의 존엄성과 생존권은 결코 어떠한 협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는데 그 또한 나의 생각과 유사한 난감함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등을 실현하는 입법의 측면에서 과도한 부담이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는 나라라면 장애인 변호사 우영우의 분투는 응원하지만 출근길 정체를 야기하는 이동권 시위에는 반대한다는 정체성의 혼란도 매우 ‘이상한’ 현상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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